스포없는 '역린' 잡다한 정보 감상기
작고 탄탄한 이야기를 찾다
“사실<더킹 투하츠> 전에 게임 속 세계와 현실 세계를 오가는 근미래SF를 준비 중이었고 초고까지 썼었는데, 입봉 감독이 맡기에는 예산이 너무 큰 영화가 되어 포기해야 했다. 그래서 좀더 작고 탄탄한 이야기를 찾던 중(이현세 화백과 오래 작업해온) 최성현 작가의 시나리오를 만났다.”
이달 말 개봉하는 영화<역린>의 감독 이재규 감독의 오래된 인터뷰에서 읽었던 말입니다. 오랜 갈증을 묻어두었던 영화판에 드디어 출사표를 던지고<역린>을 입봉작으로 선택하게 된 감독의 앞선 결의 같은 것이 보였기에 오래 전부터 특히 이 부분이 흥미를 자극했었더랬습니다. 무려 현빈의 정조 식스팩 팝콘+예매권 패키지까지 만들며 온갖 마케팅력을 총동원하고 있는듯한 롯데와 전국적으로 뛰는 감독과 배우들의 미친 무대인사 일정(ㄷㄷ), 각본가의 원작소설 출간까지... 확실히<역린>은 그 어느 때보다 이슈도 많고, 정보도 많은 영화인 것 같습니다. 비교적 영화를 맞이할 여유 시간이 충분한 셈이죠.
아닌 게 아니라 무도에 나왔던 설민석 사탐 강사가 역린 홍보에 동원될 줄 누가 알았겠음;;; 고등학교 때 이 사람 인강들었던1인으로서 반갑긴 했습니다만…-_- 여튼, 이제까지 ‘역린’이라는 말 자체의 뜻이나 ‘정유역변’이라는 실록에 기록된 실제 사건의 짧은 줄거리에 대해서는 차고 넘치게 글을 읽었던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늘 한칸 정도 더 깊은 이야기가 궁금했더랬죠. 정조는 과연 어떤 인물인가? 영화는 왜 오늘날 다시 정조를 택했는가? 하는.
<역린>을 하기로 한 건 오로지 시나리오 때문이었다.
지난 제작보고회 이후 나온 기사들을 보니 현빈은 제대 후 외국에 있는 숙소에서<역린>이라는 책을 보게 됐는데, 이미 정조라는 역할을 받고 봤음에도 살수 역도, 상책 역도 탐이 났다고 했습니다. 정조가 압도적인 비중의 주인공이긴 하지만 영화 포스터에서도 드러나듯 사실상 원톱 영화를 의도했던 건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이죠. 오히려 그 단 하루동안 벌어진 정조 암살 시도에 앞서, 그 사건이 벌어지기까지의 배경에 대해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이 저마다 어둑어둑한 이야기를 내재하고 있는 것 같달까요. 뭐 당연히 그런 호기심을 자극해야겠지만… 현빈 역시, <역린> 책에서 본 이 역할 저 역할들이 다 눈에 들어왔고, 역사적 사실 이외의 허구가 가미된 부분에서 재미를 느꼈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영화의 원작이 된 소설 <역린>은 일종의 팩션입니다. 실존했던 인물과 사건들을 중심으로 그들에 대해 심정적으로 이입하게 만드는 것이 이재규 감독이 마음에 들었다던 ‘진실성과 상상력’이 아닌가 싶은데. 머릿속에 재어두는 치밀한 계산을 착한 방식으로 모두 요구하기 때문에 현빈이 ‘착한 여우’라고 부른다는 이재규 감독 역시, 같은 맥락에서 최성현 작가(각본가)의 시나리오를 끊임없이 상기하는 듯 했습니다.
“나는 최성현 작가님이 쓴 초고와 시놉시스를 모두 좋아했다. 극의 비장미나 진실성, 상상력이 마음에 들었다. 작가님 작품의 매력을 최대한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이재규)
뒤주에 갇혀 죽은 사도제자와 그의 뜻을 품고 왕이 된 ‘역적의 아들’
영화의 각본을 맡은 최성현 작가가 최근 출간한 동명의 원작 소설 1권을 보면, 사실상 본 영화를 위한 모든 서사가 서정적인 문체로 근사하게 담겨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부분에서도 충분히 감독이나 배우들이 매료가 됐을 거라는 느낌이 들죠. 아직도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해서는 노론에 의한 정치적 희생이다, 정신병이다 등등 의견이 분분하지만 여기서는 어느 하나의 결론으로 단순화시키는데 그치지 않습니다. (물론 실록에도 사도세자에 의해 죽은 자만100여명이 넘었다는 기록이 있다고 하죠. 죽은 자의 머리를 잘라 들고 아내인 혜경궁 홍씨에게 보여줬다던가 하는 끔찍한 기행도 있었다고 전해지고요) 어쩌면 당연하겠지만 이 영화의 전체적인 스탠스와 무척 닮아있는 것 같은 원작부터가, 인물의 내면을 세공하듯 바라보고 또 바라보며 그 하나하나의 캐릭터에 깊이 몰입하게 만드는 방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만백성을 위한 군왕이 되고 싶었던 남자, 사도세자
폭군 중 하나로 온갖 기행을 일삼는 것으로 묘사되고 기억되어왔던 남자. 쌀통인 뒤주에 갇혀 물 한모금 먹지 못하고8일만에 굶어죽은 남자. 하지만 책을 보면 이런 단순화된 시선에 대한 경계처럼 읽혀지는 부분들이 상당한 것 같습니다. 밖으로 행차를 나온 한낱의 자신을 보기 위해 우르르 몰려나온 백성들의 충심에 감화되어 집권의 뜻을 새로이 펼치려 했던 남자, 그가 바로 사도세자였다는 것. 그 기폭점이 되는 온궁행차 같은 사건부터, 오랫동안 노론과 소론으로 반목하며 마찰을 빚어온 영조와의 끊임없는 갈등, 그로 인한 심신의 병, 그리고 어떠한 시도 끝에 역적으로 몰려 끝끝내 아버지로부터 스스로 죽으라는 명을 내려받는 마지막 순간까지… 조선 왕실 최대의 비극으로 기록되는 사도세자의 이야기는 참으로 애절하고도 비장합니다.
"대조께서 동궁의 자결을 명하셨다.”
한없는 비극으로 온몸을 전율하게 만드는 한 문장.
“너는 나를 버려야 한다. 그래야 네가 살 수 있다. 아비는 죽지만 온전히 다 죽는 것이 아니다. 아비의 꿈을, 아비의 교룡을 네가 증명하면 된다. 그러면 나는 다시 사는 것이다.”
(이산 정조에 대한 사도세자의 당부. 여기서 잠깐 웁니다ㅠㅠ)
-기교가 없는 사람, 정조대왕
“그간 많은 영화와 드라마가 정조를 위엄 있는 성군 혹은 강건한 개혁군주로 묘사해온 것과 달리<역린>의 정조는 아버지를 여읜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황에서 덜컥 왕이 되어 벽파의 끊임없는 위협을 견디며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려는 인물이다.” (씨네21)
“왕이라고 하면 보통 근엄하고 낮은 음색을 상상하기 마련인데, 정조는 왕이긴 해도 영화에선 고작 스물여섯밖에 안 된 청년이다. 그렇다면1년 차 왕으로서 표현할 수 있는 것들은 뭘까 고민했다. 간접적으로 정조와 비슷한 삶을 살다보니 어릴 때부터 이렇게 살아온 정조는 얼마나 많은 스트레스를 안고 불안해했을까 싶더라.” (현빈)
이 인터뷰를 읽고 나니, 예고편에서 자주 들었던 현빈 정조의 캐릭터가 수긍이 가고 새삼 기대되기도.
“왕이 되지 못하면, 나는 죽는다. 그때 이산의 나이 열한 살이었다.” (원작)
이러한 부분들만 추려봐도, 배우나 영화에서 설정하고 있는 정조의 캐릭터가 어떠한 면면에 중점을 두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아버지의 참혹한 죽음을 목격한 열한 살의 아들. 눈물로 할아버지의 지극한 용서만을 빌던 아이. 그 모든 불안하고도 두려운 세월을 끝끝내 견디어 온 마음의 결. 逆賊之子 不爲君王. 역적지자 불위군왕. 역적의 아들은 왕이 될 수 없다. 사도세자에 그치지 않고 또 한 목숨의 사멸을 갈망하는 궁궐의 혓바닥은 다시 어디로 향할 것인가……
“이 비정한 궁궐 안에서 눈물이란 것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아비가 죽어 동궁이 된 이산은 그때부터 울지 않았다. 그의 앞에 펼쳐진 왕의 길이란 단지 생존을 위한 길이란 걸 어린 이산은 알았다.” (원작)
이렇듯 원작 속 사도세자의 비극과 어린 세자의 이야기를 이으며, 영화는 이산이 조선 제22대 왕으로 즉위한 직후의 배경을 품으며 나아갑니다. 이 지극히 인간적이고 드라마적으로 치열한 이야기에선 진정한 위민과 탕평을 실현코자 했던 개혁군주의 모습이 보다 중요하게 담기진 않을 것 같습니다. 조선 역사상 대단한 성과를 냈던 군주임에도 한낱 촛불처럼 흔들리는 인간의 실존, 왕조차 피해갈 수 없었던 피와 과거의 굴레... 즉 영화에서는 각각의 인물들에 대한 탐구가 기존의 사극이나 캐릭터들과는 ‘다르다면 다르게’ 다가올 것 같습니다.
몰라보게 액션이 좋아졌다며 학원이라도 다녔냐던 살수 조정석과, 500년 묵은 괴물 고려에 이어 또 한번 왕 모가지를 노리는 챌린지정의 조재현 광백, 그리고 파워스테디셀러<한중록> 저자로 더 유명한 혜경궁 홍씨의 냉철하리만큼 무서운 정치적 판단에 대해서도 역시, 인물들 각각의 처지와 내막을 세밀하게 묘사하며 결국 하나의 사건을 통해 모두 만날 수 밖에 없는 이들의 필연적인 얼개가 드러납니다. 이제 그 모습을 영상으로 다시 확인하는 일만 남았네요.
“하루지만 그 안에 왕의 희생과 애민정신, 형제애, 짐승 같이 살아온 사람도 느끼는 사랑받고 싶은 욕구, 수단화된 인간의 초상,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깨달음이 모두 녹아 있다. 물론 이런 것들은 다 밑에 깔려 있는 메시지고 표면은 그냥 쉬운 오락영화다.” (이재규)
영화 보고 다시 스포없는 감상기도 정리해보려고 합니다. 두둠칫... 여튼, 빨리 영화로 만나고 싶네요.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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뭣보다 욕을 아주 찰지게 잘했다죠....
회의 중에 이새끼, 저새끼도 팍팍 나가고
몇 년 전 발견된 신하와의 비밀서신에 보면
(무려 서신을 주고받은 상대가 정조와 대립관계에 있었다고 알려진 노론의 지도자급이라는...;;;;
진정한 '뭐야 이거, 무서워...'급...)
찰진 욕설, 휘갈겨 쓰다가 한자가 안 떠오르다고 한글로 이어적은 듯한 문장,
요즘으로 치면 ㅋㅋㅋ 정도에 해당될 웃음표현 등...;;;
보통 호탕한 왕이 아니었을 거란 생각이 들더군요.
이런 면도 나와줬으면 좋겠지만, 그럼 영화 장르가 달라져 버리겠죠??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