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적: 바다로 간 산적'- 시사회 후기

안녕하세요.

많은 사람들이 제목에서 예상했듯이, 오늘 시사회로 관람한 <해적: 바다로 간 산적>(이하 '해적')은 어떻게 봐도

<캐리비언의 해적> 시리즈를 벤치마킹한 흔적으로 가득합니다. 크게 보면 기획부터 시작해서 극의 분위기는 물론 이야기의 흐름에서,

작게 보면 그리 낯설지 않은 장면장면에서 그런 느낌을 물씬 풍기고 있구요.

헐리웃의 대 히트 시리즈를 '우리도 한번 그런걸 만들어 보자'로 접근했다는 인상을 지우기 힘든데,

그걸 어떻게 받아들이는가가 바로 <해적>에 대한 호불호가 갈리는 지점이 아닌가 합니다.

일견 빤히 보이는 제작 의도나 기술 시사에서 적잖이 실망한 나머지 <조선미녀삼총사> 꼴이 날 것 같다는 이야기들을 통해

기대치를 아주 낮춘 덕분인지는 몰라도, 전 그 지점에서 '좋은 쪽'으로 방향을 잡았고 기대 이상으로 아주 즐겁게 봤습니다.

<해적>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육지와 바다를 넘나들며 시종일관 코믹한 분위기를 이어가는 액션물' 정도로 요약할 수 있는데,

물론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데 있어 다소 무겁고 진지한 대목도 없지 않으나

최소한 우리나라 코미디 영화에서 흔히 범하는 고질적인 단점에까진 이르지 않습니다.

계속 웃기려고 애쓰다 막판에 신파 정서를 쥐어짜며 난데없이 뭔가 가르치려 들거나,

어설픈 메시지 같은 걸 진국처럼 우려내려다 지리멸렬하지 않는다는 얘기입니다.

관점에 따라서는 역사를 심각하게 왜곡하고 있다는 지적을 할 수도 있겠고

웃음을 자아내기 위해 빚어내는 우연의 연속이 너무 작위적이라고 느껴질 수도 있겠으나, 일단 전 충분히 웃었어요.

여러 대목에서 풍기는 연출 방식이 단지 '헐리웃 영화 흉내'의 범주에 머무르는 데 그치지 않고 완전히 그것을 소화한 듯한 점도 좋았습니다.

예컨대 가장 빠른 배에 대한 농담이나 '수영' 대목은 청출어람이라고까진 못해도 청출청출까진 미쳐 줬다고 생각하거든요.

주조연에 걸쳐 모든 배우들이 두루두루 제 몫을 준수하게 해 내는 가운데 단연 눈에 띄는 것은 철봉 역의 유해진으로,

어찌 보면 유해진을 통해 웃을 수 있는가의 여부가 <해적>에 대한 호오의 리트머스 용지가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전 뭐 심하게 ㅂㅁㅁ를 하는 해적이라는 설정에서부터 펑 하고 터졌지만)

작품 특성상 시각효과가 차지하는 비중이 적지 않은 만큼 물리적인 만듦새에 대해서도 상당히 신경이 쓰였는데,

의외로 몇몇 장면을 빼면 시각효과도 준수하더군요. 우려를 모았던 고래의 표현은 딱히 나무랄 데 없었고,

바다를 무대로 펼쳐지는 액션도 이만하면 칭찬해줄 만 하다고 봅니다.

그러나 어딘가 모르게 뭐라고 표현하기 힘든 어색함 같은 게 느껴지는 것 또한 사실로,

속도감이 상당한 롤러코스터 액션이나 다수와 다수가 맞붙는 전투씬까지 매우 호쾌하게 풀어내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왠지 <캐리비언의 해적> 시리즈에서 느꼈던 강한 바람과 물보라까지는 느껴지지 않는달까요.

이 부분은 시각효과나 액션 연출보다는 편집의 문제가 아닌가 합니다.

평소 편집에 대해 다소 느슨한 편인데도 불구하고 이상하리만치 장면과 장면이 이어지는 부분들 대다수가 조금씩 어색했기에

속도감 넘치는 액션에서조차 그 장점을 조금씩 깎아먹었다는 생각마저 듭니다.

다소간의 단점에도 불구하고 종합적으로 <해적>은 킬링타임용 팝콘 무비라는 속성에 매우 충실한, 재미있는 영화였습니다.

이건 제가 <조선명탐정: 각시투구꽃의 비밀>을 봤을 때와 비슷한 인상인데, 극장에서 느끼는 쾌감으로 치면 <해적>쪽이 더 좋네요.

올 여름시즌 한국영화 4강구도에선 유일하게 가벼운 분위기의 영화인 걸로 아는데,

슬프고 우울한 영화를 보면 한동안 후유증에 시달리는 저같은 관객에게라면 충분히 어필할 만 합니다.

솔직히 말하면 제가 요새 영화관에 자주 찾을 형편이 안 돼서 그렇지, 한번쯤 더 관람해도 좋겠다 싶은 생각까지 들더라구요.

좋은 자리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최근 서너달이 줄곧 우울한 나날들이었는데 덕분에 아주 즐거웠어요.

-  EST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