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랜드 피아노] - 폰부스의 음악 버젼

<그랜드 피아노>를 보았습니다.

‘사랑하는 이의 목숨을 담보로 주인공이 정체불명의 적으로부터 조종당한다.’라는 폰부스 컨셉의 영화로, 사건이 일어나는 장소가 피아노 연주회장이라는 점이 색다릅니다. 천재 피아니스트 톰 셀즈닉은 복귀 무대 위에서 연주 도중 아내를 죽이겠다는 협박을 당합니다. 이후 영화는 연주와 심리 대결이 함께 진행됩니다.

무대와 객석이라는 한정된 공간을 이용한 스릴러 장르에 클래식을 덧입힌 설정이 신선하게 다가왔습니다. 무대 위 예술이 펼쳐지는 동안 살인이 벌어진다는 점에서 호러 영화의 거장 다리오 아르젠트의 영화 <오페라>가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연인이 난자당하는 걸 두 눈 똑똑히! 보게 하려고 여자 눈 아래에다 촘촘히 바늘 붙이던 장면은 지금 떠올려 봐도 강렬하고 충격적이네요.

타인에 대한 목숨을 담보로 누군가를 조종한다는 이야기야 우려먹을 대로 우려먹어 장르의 전형이 된지 오래지만, 이 영화는 전형을 비트는 영리함을 발휘해요. 자신의 트라우마에 직면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주인공을 밀어 넣는데 이용하니까요. 개인의 내면 심리를 파고 든다는 점에서는 알프레드 히치콕의 영화와 닮아 있습니다. 히치콕 영화의 주인공들은 대부분 불안증이나 신경증에 걸려있는 인물들이죠. 톰 셀즈닉 역시 심리적으로 불안한 인물입니다. 시작부터 그 크고 아름다운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면서 앞으로 벌어질 일에 대해 노심초사합니다.

톰이 <라 신케토>를 연주하라는 협박을 받는 장면을 보세요. 이걸 연주하다 대박 실수해서 은퇴해서 5년을 잠수탔는데, 또 이걸 연주를 하라고? 너 나한테 왜 이러냐! 이런 얼굴 표정으로 톰이 트라우마에 휘감기는 순간, 조명이 바뀌고 화면이 붉게 변합니다. 공포에 질린 인물 내면의 심리가 미장센화되어 표출된 것이죠. 자연스럽게 <현기증>의 한 장면이 떠오릅니다.

또 다르게는 연주자의 연주를 조종하고자 하는 광적인 클래식 관객의 이상 심리물로 풀수도있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듣고 싶은 대로 연주자들을 연주하게 한다! 이 얼마나 매력적이면서도 미친 생각입니까? 분명 감독과 시나리오 작가는 클래식 오타쿠일 겁니다. 그러고보니 감독 유지니아 미라는 <타임크라임>의 음악감독이기도 했군요.

이런저런 기대감을 갖고 영화는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아쉽게도 제 기대치를 충족해 주지는 못하더군요.

매력적인 소재를 이렇게 단순하게 풀고 끝내 버리다니요.

톰과 협박범 사이의 심리적 밀당의 템포는 빠르고 밀도는 있습니다만, 심리 대결에만 주력한 나머지, 이야기 자체의 구성이나 주변 인물의 활용에는 크게 신경 쓰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야기를 진행하는 동안 등장하는 톰의 친구부부나 공범자는 기능적으로 소진되고 맙니다. 말싸움하다 한방씩 맞고 무대를 퇴장하는 배우들 같아요.

어쨌든 별 생각 안하고 그냥 즐기기엔 무리가 없는 영화이긴 합니다. 클래식을 좋아하시는 분은 연주 들으러 갔다 영화도 보네? 라는 느낌으로 볼 수 있을 겁니다.

1. 피아니스트 톰 셀즈닉을 연기한 일라이 우드의 연주가 상당해서 실제 연주자의 얼굴에 CG합성이라도 했나 했는데 실제로 연습을 많이 했다고 하더군요. 피아노를 너무 잘 쳐서 놀랬습니다.

2. 감독은 연주회에서 핸드폰 켜 놓는 사람이 제일 싫었나 봐요. 연주에는 관심 없고 좋은 자리 탓만 하던 톰의 친구부부는 매너 없이 핸드폰을 켜 놓은 바람에 살해당하고 맙니다!

3. 피아니스트는 연주만큼 문자 쓰는 것도 빠르다!

4. 예고편이 본편보다 낫다.

별: 두 개 반.

---------------------------------------------------------------------------------------------------------------------------------JSK